http://unn.net/ColumnIssue/Detail.asp?nsCode=59125&cCode=1
한국대학신문(2010년 2월) 논설위원칼럼
갈등시대의 진정한 원로
허경호(경희대학교, 언론소통학)
최근 영화 아바타를 보고 인간의 상상력은 과연 어디까지 미칠 수 있을까 하면서 경탄했다. 3D Imax로 펼쳐지는 생생한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치 현실의 공간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2시간 반이 넘도록 몰입했었다. 평면에서 전개되는 종래의 2D 영화와는 분명 차원이 다른 세계였기에 관람 후에도 그 감동과 충격이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머물렀다. 오죽하면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자기가 만들어놓고 자기도 놀랐다는 말을 했을까? 평면화면으로 아바타를 관람했다는 사람에게 목청을 높여 3D Imax로 다시 볼 것을 강권한 것은 소위 영화의 패러다임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경험만으로는 쉽게 상상을 할 수 없는 전례 없는 사상(事象)이 수없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이 요즘의 소위 디지털세상인 것이다. 2차원만 경험해본 사람이 3차원의 세상을 경험한 사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요즘 우리사회의 화두는 단연 소통이다. 이념간,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리라. 이런 뿌리깊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으로 소통 외에 다른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대학에 있다 보니 특히 세대간 소통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세대간의 소통문제는 단지 세월의 차이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제어 혹은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과거에는 세월과 함께 쌓인 경험 혹은 지식이 곧 지혜와 권위를 나타냈지만 이젠 오히려 새로운 사상을 해석하고 변화를 추구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2차원의 경험으로는 3차원의 경험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흔히 대학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하면 직업의 안정성이나 명예 등을 장점으로 들지만 뭐니 뭐니 해도 진정한 특권이라면 항상 젊은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과 생활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기에 젊음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다. 젊다고 하면 단지 신체적으로 젊다는 사실만을 생각하는데 나는 젊다는 것은 곧 변화에 민감하고 변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살아온 날이 비교적 짧기 때문에 경험에 갇혀 눈앞에 전개되는 새로운 사상을 과거의 틀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이 살아온 날이 긴 사람에 비해 비교적 덜하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 인간이 개인으로는 얼마나 변화에 저항하는 고집불통의 존재인지는 1-2세의 어린 아이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주변의 것들을 자기 세계에 맞추려 하고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떼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아니 얼마나 살아봤다고 벌써 자기 고집을 피우는지 정말 어이가 없다. 이러니 모든 것을 순리대로 이해한다는 이순(耳順)에 이르러서는 어찌될 것인지는 상상이 간다. 하기야 인지심리학에서나 언론소통학에서도 인간이 고집불통(obstinate)이라는 것은 널리 받아들여진 사실이다. 즉, 경험에 의해 구축되는 스키마나 스크립트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정교해지면서 쉽게 변하지 않는 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 번 구축된 이런 인지적 정보처리 틀이 바뀌려면 어떤 충격적인 계기가 필요한데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이런 변화에 수반되는 스트레스나 고통을 피하려 하기 때문에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디어에 의해 쉽게 설득되지 않고 면대면 접촉을 통한 설득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인간은 경험의 동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생득적 성향이 있다고 운명처럼 경험의 노예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험을 잘 제어해서 일상에서 체험하는 자극을 새롭게 해석하면 나이에 걸맞게 더욱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남의 말에 기꺼이 귀 기울일 줄 알고 불필요한 경험의 틀을 과감히 삭제해 버리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란 항상 어느 정도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자만이 이 새로운 디지털 세상과 소통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사회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원로란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청년 같은 마음을 간직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갖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시대의 탁월한 소통학자인 마샬 맥루한이 남긴 Dont try to solve todays problem with yesterdays tool라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눈앞에 전개되는 현재의 문제는 그 본질과 형태가 전혀 다른 선례가 없는 것임에도 이를 과거의 도구로 해결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연륜과 경험이 풍부하면서도 새로운 생각과 젊은 사람의 생각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과거의 불필요한 경험의 틀을 과감히 삭제할 줄 아는 진정한 원로가 필요한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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